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거 제도 (문단 편집) ====== 전시 ====== 왕이 직접 나와서 문제를 내는 전시에서는 대과 복시 합격자들이 대책에 대해 써 올렸는데, 그것은 현실의 정책이나 문제되는 사안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책문이라고 한다. 왕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면 장원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7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서의 3차 시험(면접)에 해당된다. * [[세종대왕|세종]] - [[인사(직무)|인재를 등용하고 양성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여라. * [[중종(조선)|중종]] - [[한중관계|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해야 하는지를 논하여라. * [[중종(조선)|중종]] - [[술]]의 폐해는 오래되었다. (중략) 우리 조선의 여러 훌륭한 임금님들께서도 대대로 술을 경계하셨다. (중략) 그런데도 오늘날 아랫사람들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폐단이 더욱 심해져, [[술고래|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술버릇|술에 중독되어 품위를 망치는 사람도 있다.]] 흉년을 만나 [[금주령]]을 내려도, 민간에서 끊임없이 술을 빚어 곡식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이다. 이를 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 [[명종(조선)|명종]] - 근래에 와서 [[성균관|학교]][* 당연히 이 시점에서 말하는 것은 관학이다. 사학만 판을 쳐서 관학을 진흥시킬 방법은 과거 제도가 존재했던 모든 동아시아권 국가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관심사였지만, 단 한 곳도 제대로 성공한 곳이 없다.]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 이를 개선할 방책을 논하여라. * [[광해군]] - [[대동법|공납품을 토산물 대신 쌀로 바꾸는 것]]에 대해 논하여라. * [[숙종(조선)|숙종]] - [[왜국]]에서 [[울릉도]]를 [[다케시마|죽도]]라고 부르며 [[독도 분쟁|우리 백성들의 어로 활동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의 입장을 설명해 줘도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물론 진지한 문제만이 나왔던 것은 아니다. * [[광해군]] -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1616년 광해군 8년 증광 회시 책문) * [[정조(조선)|정조]] - 온갖 식물 가운데 이롭게 쓰이고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으로 [[담배|남령초]]보다 나은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모든 백성이 [[흡연|남령초를 피우게 할 것]]인지 대책을 말해 보라.(1796년 규장각 초계문신 남령초 책문) 다만 조선 시대에서는 시, 글짓기 같은 문학적 소양 역시 관리의 능력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영 이상한 질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서 격이 높은 문학이란 단순히 가사가 아름답고 운율이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과거의 다양한 고사에 담긴 내용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의 교양과 지식 수준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정조의 뜬금없어 보이는 담배 찬양도, 실제로는 당시엔 상품 작물로서 수익이 매우 큰 담배 농사의 증가 때문에 정작 [[벼]] 등 식용 작물의 비중이 줄어들자 이에 대한 찬반이 매우 거세지는 상황이라 이 담배 농사를 지지하면서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조 본인이 [[애연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이명한의 <백주집>(白洲集) 중 '잡저'에 따르면, 광해군의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에 대해선 당대의 문인인 이명한이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然則人能傷歲 歲不傷人)라는 답안을 제출했다. 이명한의 이 답안은 비록 장원은 못했지만 아원(亞元, 과거 급제자 중 차석)이라는 고득점을 받았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 이치에 관련된 대책도 출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명종(조선)|명종]] 13년(1558년)에 출제된 대책으로, "해와 달이 떴다 지는데 [[여름|어떤 때는]] [[하지|낮이 길고]] [[겨울|어떤 땐]] [[동지|밤이 긴데]] [[자전축|왜 그런가?]] 일식과 월식은 왜 생기나? 밤하늘의 보통 별과 행성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별이나 혜성은 어떤 때에 보이는가?" 라는 무슨 과학 퀴즈 같은(...) 문제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이이(조선)|이이]]의 그 유명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828|천도책]]'이 나왔다. 당시 천도책을 본 시험관들은 '여러 날 밤을 새워 가며 문제를 만든 우리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쓰지는 못한다.'라고 평했으며, '''시험 답안지를 뛰어넘어 대학 교수의 연구 논문까지 초월하고 나아가 조선의 성리학계를 뒤흔들어 버린 수준'''에 유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물론 저 멀리 명나라에도 전해져서 조선으로 온 명나라 사신들도 이이를 찾았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성리학 연구의 정수로 전해질 정도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천도책은 세 시간 만에 작성되었으며 당시 이이의 나이는 만 21세로 지금으로 치면 대학생 혹은 군인 정도였다. 이렇게 3차 시험인 전시는 합격자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왕이 직접 주관했으며 성적순으로 갑과에 3명, 을과에 7명, 병과에 23명을 배정했다. * <갑과>: 1~3위 1위: [[장원]](壯元) - '''종6품''' 수여, 이를 '출륙'이라고 한다. 2위: 아원(亞元) - 또는 방안(榜眼)이라고도 부른다. '''정7품''' 수여 3위: 탐화랑(探花郞) - 을과와 병과 급제자들의 어사화는 이 사람이 왕으로부터 전달받아 꽂아준다. '''정7품''' 수여 * <을과>: 4~10위: '''정8품''' 수여 * <병과>: 11~33위 - 병과 23명은 '''정9품''' 수여 다만 장원이 얻는 종6품과 병과가 얻는 정9품 사이엔 5계단 정도였고(정9-종8-정8-종7-정7-종6), 이 사이의 시간 간격이 7년 정도로 꽤 컸다. 지금으로 치자면 5/7급 공무원 시험을 같이 쳐서, 갑과에겐 5급(사무관)을, 을과에겐 6급(주사), 병과에겐 7급(주사보)을 줬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7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려면 15-21년 정도 걸린다.] 특히 조선 초기는 몰라도 중기엔 과거 합격자가 과잉공급 되어서 적체되었는 바람에, 갑과만 임용이 확정되고, 을,병과는 이조의 관직 임용을 받을 기회만 주어졌다.이 때는 갑과와 조상 4대조 중 관리가 있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임용되었기에, 만약 [[권율]]처럼 명문가 태생이라면 병과라도 임용이 확정되었지만, 한미한 가문이라면 늙을 때까지 관직에 못 올라가는 경우도 꽤 있었다. 괜히 장원을 원하는 게 아닌 것. [[이이(조선)|이이]]의 경우 '''과거시험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과거시험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9번은 정말 과거시험 자체를 9번 본 게 아니라 2번 치러지는 과거시험의 여러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아울러 9회 장원을 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능력인 건 맞다. 당연히 과거 합격자가 많은 가문은 명문가로 칭송받았다. 전주 이씨가 가장 많은 문과 합격자(870명)를 냈고, 그 다음으로 안동 권씨(368명), 파평 윤씨(346명), 남양 홍씨(당홍계)(292명), 청주 한씨(292명) 순서다.[[http://people.aks.ac.kr/front/board/person/viewPersonStatus.aks?bbsCode=126&isEQ=false&kristalSearchArea=P|#]] 덕수 이씨인 [[이순신]]의 후손들은 단 한 명만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과에서는 26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순신 항목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정확히는 직계인 '충무공파'에 국한된 얘기.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어서 문과 쪽인 문성공파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야샤에서는 왕이 암행을 나갔다가 어떤 유생한테 좋은 이미지를 얻어서 돌아온 다음 갑자기 별과를 실시해 그 유생의 맞춤형 문제를 줘서 급제시켰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숙종(조선)|숙종]]에 관한 야사 중 암행 나갔을 때 어떤 곤궁한 집에서 머리를 가린 며느리과 아들이 시어머니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시어머니는 그들을 보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들에게 까닭을 물어보자 아들이 집이 가난해서 며느리가 머리카락을 잘라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렸는데 그걸 알게 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한 안쓰러움에 생신상을 받고도 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나중에 과거시험에서 "한 노파는 울고, 젊은 여중은 춤을 추고, 사내는 장구치며 노래한다"라는 주제를 내놓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답을 쓰지 못했으나 아들은 정확한 답을 적어 급제했다는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